Friday, January 14, 2011

7만5천명의 아기를 낙태한 어느 산부인과 의사의 체험, 죄책감과 후회, 낙태수술의 진실, 고백, 간곡한 호소

M. 피오트로프스키 신부


미국 코넬 대학교 의대 교수인 버나드 나탄손 의학박사는 철저한 무신론자였으며, 아마도 전 세계에서 낙태를 가장 찬성한 사람들 중의 한명이었을 것이다. 그는 미국에서 낙태가 합법화되도록 하기 위해서,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렴한 비용으로 낙태 시술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지치지 않고 투쟁했다.
그는 1968년에 세워진 국내 낙태 권리 찾기 협회의 창립 멤버이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낙태 전문병원을 운영했으며, 그동안 75,000건의 낙태 시술을 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회한과 고통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고백한다.
“그 숫자에는 태어나지 못한 나의 아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아이를 내 손으로 죽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에 기적이 일어났다. 그의 영혼과 마음에 기적이 일어났다. 지독한 낙태 찬성론자였던 그가 적극적으로 태아 생명 보호자이며 옹호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년의 준비를 거쳐 1996년에 그는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종교는 목에 걸린 가시 같은 것


버나드 나탄손 박사는 1926년 미국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대학 시절 전통적이고 근본주의 적인 성격이 강한 유대교에서 돌아섰다. 그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 하느님보다 “더 높은 힘”을 믿었다.
이런 아버지에게서 받은 허무주의적 확신과 신앙은 버나드의 삶과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더욱이 그의 아버지는 자기 아내, 곧 버나드의 어머니를 거의 증오했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아들 버나드를 뉴욕의 명문 사립학교에 보냈는데, 매우 부유한 유대인 가정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버나드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유대교의 그늘에서 벗어났으며, 종교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종교는 목에 걸린 가시마냥 귀찮은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교 신앙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들 버나드를 일주일에 세 번씩 유대인을 위한 학교에 강제로 보냈다. 버나드는 그곳에서 히브리어로 기도문을 외웠고 그러면서 유대교에 대해 잔인하고 완고한 인상을 갖게 되었다. 그것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유년시절에 내가 느낀 하느님은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어둡고 위엄만이 가득하고 수엽이 있는 모세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왕좌처럼 보이는 곳에 기진맥진하여 앉아서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저주의 판결을 나의 운명에 내리는 그런 존재였다. 내가 유대교에서 받은 하느님의 인상은 위협적인 힘을 갖춘 사자의 모습이었다. 그런 까닭에 공군에서 복무하던 시기에 저녁 성경 공부반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오로지 좌절과 지루함만을 맛보았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공부하면서 하느님은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분이며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이 가득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나는 무척 놀랐다. 드디어 나는 그토록 찾고 있었던 바로 그것, 그토록 오랫동안 열망했던 그것, 바로 용서를 그 하느님에게서 찾게 되었다.”


1945년 그는 캐나다에 있는 맥길 대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4학년 때 수업 중 그는 유대인이며 정신과 전문의인 칼 스턴 교수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받게 되는데. 그때만 해도 스턴 교수가 오랜 숙고를 거쳐 1943년에 가톨릭 신앙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스턴 교수는 자신의 개종 경위를 ‘불기둥’이라는 제목의 책에 담아 1951년에 출판하게 된다.
버나드는 1974년에 비로소 그 책을 읽게 되는데 그때 그는 어떤 충격을 경험했다. 따라서 그 책은 그가 개종하는 데 가장 많이 기여했다. 그 책 마지막 장에서 스턴 교수는 신실한 유대교 신자인 동생에게 자신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교회의 가르침은 불변이다. 학문에 불변의 진실이 있듯, 초자연적 세계엔 불변의 진리가 있다. 물질의 영역은 진보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정신의 영역은 그에 맞는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독일 사회주의자들에게 쓴 교황의 교서를 네게 보여주었던 그때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너는 진정으로 깊은 인상을 받아, ‘마치 1세기에 쓴 것 같다.’하고 말했었다. 내가 개종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낙태의 세계로, 사탄의 세계로


1945년 대학생이 된 버나드는 매력적인 열일곱 살 처녀 롯을 신입생 무도회에서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으며,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으며, 결혼도 계획했다. 하지만 롯이 임신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애틋한 감정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낙태하기로 결정하고는 수소문 끝에 한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의사는 자신의 병원에서 그 당시에도 불법이었던 낙태 수술을 비밀리에 하고 있었다.
소원대로 아이를 제거하고 나자 버나드와 롯은 일종의 공모자가 되었다. 몇 년이 흐른 뒤에 버나드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나는 분명히 보았다. 단호한 눈길, 여전한 사랑, 매우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결정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은 우울한 빛을 감출 수 없었으며 그녀의 눈에는 이런 질문을 담고 있었다. ‘왜 이사람은 나와 결혼하지 않는가? 왜 우리는 이 아이를 낳지 않았는가? 왜 나는 나의 생명과 미래의 내 아이들을 위험 속에 내모는가? 이 사람의 경력을 위해서인가? 하느님께서 내가 한 짓에 대한 벌로 앞으로 절대 임신을 못하도록 하시는 것은 아닐까?”
그 시기에 종교적인 가르침이나 규정 등은 버나드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가 글에서 밝혔듯이, 그의 내면에서는 무신론자의 특징이 단단하게 성숙되고 있었다. 그는 단지 롯의 건강과 미래의 임신 능력만이 염려되었다. 곧 그들은 헤어졌다. 이 경험이 버나드를 낙태의 세계로, 사탄의 세계로 이끌었다.
1960년대 중반에 버나드는 산부인과 수련의 과정을 마쳤다. 그때부터 그의 놀라운 경력이 시작되었다. 그 무렵에 이미 그는 두 번의 결혼 실패 경력을 지니게 되었는데, 지금에 와서 그가 시인했듯이, 그 실패는 “이기주의, 자애심, 사랑에 대한 무능력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 그를 매우 사랑했던 한 여자는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는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는 아이를 키울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낙태를 강요했다. 더욱이 낙태하지 않을 경우 그녀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위협도 서슴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낙태 시술을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는 전문가답게 직접 자신의 아이를 지워버렸다.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자신은 단지 낙태 전문의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확신했다.
대개의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낙태 후유증에 관해 그 당사자들에게 일절 알리지 않았다. 그는 개종 후에 이렇게 고백했다.
유방암과 낙태의 관련성이 이제 밝혀졌다. 그리고 엉망으로 낙태 시술을 받게 되면 임신 능력을 상실한다는 사실이 수천 명의 여자들에게서 증명되었으며, 임신 13주 이후에 낙태 시술을 받은 여자들의 사망률이 자연 분만한 여자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높다는 사실이 보고되었다.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오만불손은 직업의 특징 정도로 간주되지만 낙태 시술 의사들의 불손은 가히 놀라울 정도다. 그들은 얼음같이 차고 비양심적이며, 자신의 의학 지식을 무자비하도록 규범에서 벗어나게 하고 자신의 윤리적 의무를 해치면서 낙태를 원하는 여자들을 돕는다. 아니, 오히려 그 여자들을 그릇된 길로 이끈다. 자기 학살과 같은 그것을 하기 위해서 자신을 위로하는 그들, 프로 근성을 가진 그들! 그들의 그 다음 행보가 법에 대한 권한을 장악하는 곳이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십자가 고통을 얕잡아 보고서 십자가를 자기 어깨에 걸머진 ‘눈먼 인도자’가 예수님께서 마신 독배를 건네받는다면 그에게 세상은 얼마나 다르게 보이겠는가?
1968년 버나드 나탄손 박사는 미국에서 낙태를 합법화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인 ‘국내 낙태 권리 행동 단체’의 창립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1970년 뉴욕 주에서 낙태가 합법화 되었고,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낙태 전문 병원의 원장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75,000건의 낙태 수술을 했다고 고백했다. 개종하기 직전에 그가 쓴 논문(‘어느 낙태 전문의의 고백’이란 제목으로 출간)에서 그와 NARAL의 동료들이 미국과 전 세계의 낙태 금지법을 파기하기 위해 사용했던 전술을 볼 수 있다.
1960년대엔 미국에서 낙태 반대 의견이 강했다. 그런데 5년동안 NARAL의 “전문가”들이 면밀한 계획 하에 대대적인 광고 운동을 펼치고 미국 대법원을 설득한 끝에, 임신 9개월 이내엔 낙태를 허용하는 법이 1973년에 제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NARAL은 목적을 달성하는데 유리하도록 거짓 자료를 이용하여 미국인의 60%가 낙태를 찬성하는 결과를 내도록 유인했다. 즉 매년 불법적인 낙태로 사망하는 여자들의 수가 200-250명 정도이지만 만 명으로, 불법적인 낙태 시술을 받는 여자들이 1년에 십만 명가량이지만 백만 명이라고 숫자를 부풀렸다. 언론 매체를 통해 이런 거짓말을 지속적으로 반복함으로써 마침내 대중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NARAL은 낙태 반대에 강한 목소리를 내는 가톨릭 교회를 향한 공격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위선적인 악당들”로 몰아붙이면서 “성직자들만이 낙태를 반대하며, 전 세계 대다수의 가톨릭 신자들은 낙태를 찬성한다.”는 거짓을 언론에 유포했다.
NARAL은 또한 학문적인 정보를 봉쇄했다. 인간의 생명은 출생과 함께 시작되므로 태아는 생명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생명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학문이 아닌 철학과 신학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버나드 나탄손 박사는 자신이 유포했던 이 거짓말을 직접 뒤집는다. “그것은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태생학에서는 임신 순간부터를 생명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개탄한다.
“지난 25년 동안을 돌아보니 내가 임신한 여성들과 낙태아들에게 얼마나 혐오스런 짓을 저질렀는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렀는지, 짐작도 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신으로 매우 높은 윤리 도덕의 경계선을 넘어갔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분명 그 모든 것은 파렴치한 것이었다. 왜 우리 개업의들이 윤리의식을 잃어버렸고, 탐욕스런 동기만 깔린 수치스런 행위를 일삼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는가? 왜 기업과 이익의 사슬로 그 안에 얽혀 있는 사람들의 극단적인 어리석음이 우리 눈에 띄지 않았던가? 왜 우리는 윤리적인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는 행위를 할 수 없었는가?”
낙태는 살인이다.
1973년 버나드 나탄손은 뉴욕에 있는 성 루카병원의 산부인과 과장이 되었다. 그때 태아를 관찰할 수 있는 초음파 기기가 최초로 그곳에 설치되었다. 초음파 기기의 힘을 빌려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았던 그 순간의 감동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으로 우리는 인간의 태아를 볼 수 있었고, 진단하고 관찰하며 그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 …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보면서 나는 아주 강한 인상을 받았다.
초음파 검사의 도입은 인간의 태아에 대한 그의 시각에 극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초음파 기술 덕분에 태아도 정상적인 인간 생명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 기관의 기능을 측량할 수 있고, 태아의 무게를 재거나 나이를 결정할 수 있으며, 삼키고 마시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자거나 깨어나는 것은 물론이요 모든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었다. 태아는 세상에 태어난 아이와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원하는 낙태”에 더 이상 설득되지 않았다. 그는 낙태 수술 횟수를 철저히 제한했으며 의학적으로 꼭 필요한 경우에만 응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낙태 수술을 한 것은 1979년이었다.
1984년부터 그는 낙태에 더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래서 감정을 배제한 채 기구를 여성의 자궁에 삽입하고 태아의 살점을 찢고 도려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는 낙태 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하루에 20회 이상씩 낙태 수술을 했던 친구에게 부탁하여, 낙태 과정을 필름에 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스튜디오에 앉아 필름을 돌려보았으며 그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충격을 주었다.”
그 자리에서 친구 의사도 더 이상 낙태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할 정도였다. 그동안 수없이 낙태 수술을 했지만 그 실상을 객관적으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필름은 전문가의 손을 거쳐 영화 ‘침묵의 절규’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 영화는 아무런 죄도 없고 방어력도 없는 피조물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하고 잔인한 범죄의 기록을 보여준다. 그 영화에서 12주된 태아는 자신의 살점을 찢어내고 흡입하는 기구들을 상대로 필사적인 방어를 되풀이한다. 그 영화는 1985년 3월 1일 미국 플로리다에서 처음으로 상영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낙태를 지지하는 자들은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으며, 언론 매체도 진실을 가리려고 시도했다. 한 TV 방송국은 이 영화의 방영을 거부할 뿐 아니라 생명 보호 광고 시간도 허락해주지 않았다. 이것은 언론 매체들이 죽음의 문화를 위해 존재하는 세력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버나드 나탄손 박사는 학문의 객관적인 토대를 바탕으로 자신의 마음을 열었다. 그는 인간의 생명은 잉태의 순간에 시작되고, 낙태는 살인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왔다.”


버나드 나탄손 박사가 하느님께의 믿음에 이르게 된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나는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지상적이고 육적인 것만을 동경했다. 나의 목표들은 모조리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감각적인 것들이었다. 당장에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이었다. 경직된 유대인 무신론자이며 피상적인 유대인이었던 나는 눈에 보이지 않고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모든 것을 경멸했다.”
1978년에서 1988년까지의 기간은 그에게 특별히 힘든 시간이었다. 매우 고통스런 방법으로 자기 삶의 짐을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매일 새벽 네다섯 시 사이에 일어나 어둠 속을 응시하면서 배심원과 판사들이 나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는 장면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그 희망으로 기도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희망이 상상으로 끝나고 나면 나는 불을 켜고 죄를 주제로 쓴 문학서를 펼쳤다. 성 아우구스티노, 도스토예프스키, 폴틸리히, 키에르 케고르, 니부르 그리고 루이스 멈포드의 글과 왈도 프랑크의 고백에 나오는 구절까지 읽고 또 읽었다.”
너무 절망한 나머지 그는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자신의 손에서 생명을 빼앗긴 수천 명의 무죄한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에워싸는 정신적인 고통과 절망감을 약물이나 알코올 또는 자기 최면술과 신경정신과 상담을 통해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생명 운동에 깊이 참여했다. 강연과 책과 정치적 활동도 동원했다. 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멀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낙태 시술 병원 앞에서 수백 명의 경찰관들에 의해 둘러싸인 채 낙태 반대 집회를 열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큰 소리나 폭력을 동원하지 않았다. 오로지 조용히 기도에만 몰두했다. 기도하는 그들의 얼굴에서는 진실한 사랑의 빛이 흘렀다. 그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기도에 몰두했으며 절대적 비폭력의 원칙을 지켰다. 그것은 그에게 감동과 놀라움을 선물했다.
“그날 나는 그들의 순수한 사랑과 기도에 놀랐다. 그들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위해 기도했고, 불안에 휩싸인 임신 여성들을 위해 기도했으며, 의사와 간호사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경찰관들과 언론 매체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결코 기도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자문했다. 어떻게 이 사람들은 말도 못하고 볼 수도 없고 자신들에게 고맙다는 인사조차도 할 수 없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날 그런 체험 이후 버나드 나탄손 박사는 생애 처음으로 하느님이란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과 친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문제를 통해서 나에게 구원과 자비의 길을 보여주려 했던 하느님을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때껏 내가 굳게 매달려 있었던 18세기 철학과 이별을 고했다. 갑자가 나의 과거는 죄와 멸망의 더러운 늪이 되었다. 그런 생각은 나 자신을 가장 사악한 범죄자로 고발했다. 그러나 동시에, 마치 기적처럼, 나의 죄 때문에 누군가가 2000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나에게 희미하게나 희망의 불꽃을 던져주었다.”
그는 하느님을 찾기 위해 영적인 여행을 계속했다. 그는 말콤 머저리지, 헨리 뉴먼 추기경, 그레이엄 그린, C. S. 루이스, 워커 퍼시 등의 위대한 가톨릭 개종자들의 전기를 매우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고 그는 고백했다.
“하느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멸망으로 떨어져야 마땅했다. 그분을 찾기 위해서 온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는 것이 나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할 수 없는 강한 원의로 그분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의대 지도교수이며 학창시절 나의 영웅이었던 칼 스턴 교수를 떠올리게 되었으며 그가 자기 동생에게 썼던 편지글도 새로이 다가왔다. ‘그 사실에 대해서 의심할 바가 없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로 달려간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그분은 언제나 사물의 한가운데에 계신다.’”
버나드는 생명 운동가들이 자신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의 내면에서 부드럽고 자연스런 방법으로 영적인 탈바꿈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그에게 내적인 홀가분함과 평온함을 선물했다. 그는 매주 규칙적으로 존 맥클로스키 신부와 만나면서 그의 영적 지도를 받으며 신앙의 길로 인도되었다.
1996년 12월 9일 뉴욕에 있는 성 페트릭 대성당에서 버나드는 존 오코너 추기경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유대인 친구들은 버나드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를 받아 들였다. 이것은 나에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나는 유대인의 문화와 전통 속에서 성장하고 살았으며 나는 유대 민족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 시기부터 그는 규칙적으로 미사에 참례했으며, 고해성사를 받았고, 깊은 기도의 삶을 살았다. 학자로서 그는 자신의 책과 영화와 세미나를 통해 모든 생명의 주인은 거룩한 하느님이시며, 그래서 아무도 생명을 함부로 없앨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이로써 전 세계에서 낙태의 최고 옹호론자였던 사람이며, “뻣뻣한 목을 가진 무신론자”였던 사람인 버나드 나탄손 박사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된 일은 의심할 바 없이 20세기에 있었던 가장 위대한 개종 사건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그는 1996년 10월 19일 폴란드를 방문하여 포르친스키 회랑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폴란드의 국회의원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여러분에게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낙태를 합법화하는 방향으로는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마십시오! 역사는 그런 여러분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우리가 했던 실수를 바탕으로 경고합니다. 낙태를 찬성하는 한 표는 동시에 안락사를 찬성하는 표가 될 것이며 나아가 노인과 장애인도 죽이는 표가 될 것입니다. 그 한 표는 궁극적으로 유전학 연구에 쓰이면서 모든 인간을 생명이 아닌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가는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 위 글의 모든 인용문은 버나드 나탄손 박사의 <하느님의 손 -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여행 - 개종한 낙태 전문의의 이야기>(오스트리아, 1997)에서 발췌되었다.)


이정은 옮김


낙태의 위험에 처해 있는 태아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예수, 마리아, 요셉
저는 당신을 매우 사랑합니다.
당신께 간구하오니
낙태의 위험에 처해 있는
영적으로 제가 입양한
태아의 생명을 구해주소서.
아멘.


이 기도문은 뛰어난 설교가이며
저술가였던 풀톤 쉰 대주교가 작성한 것으로,
특정 대상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낙태의 위험에 처해 있는 어느 생명이
무사히 세상에 태어날 수 있도록 간구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폴톤 쉰 대주교는 이 목적으로
‘영적 입양 기도 운동’을 창안하여
낙태의 죄를 막고 보속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마리아 163호 (2010/9-10월)


[출처] 어느 낙태 전문의의 개종이야기 작성자 바다의 별

낙태를 생각하신다면 꼭 읽어 보세요...

http://blog.naver.com/yourpower/20120345286


Thursday, January 13, 2011

낙태수술 직전에 출산을 결심한 한 젊은 엄마의 이야기-"나는 아이를 낳겠다고 결정한 것을 단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마리아 그룬베르거(Maria Grundberger)는 임산부의 출산을 돕는 산파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근무시간이 아닌 때는 한 낙태 시술 병원 앞에 서서, 낙태를 하려고 결심한 여성들의 마음을 바꾸려고 애쓰고 있다.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꿔 아기를 낳게 하려고, 낙태를 막으려고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

"낙태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젊은 산파인 마리아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아니오" 라고 말하면서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출산을 택한 젊은 엄마들이 얼마나 고마워하고 기뻐하는지를 힘주어 말했다. 또한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낙태를 원했던 이들 모두가 얼마나 잘 극복해가는지도 전해주었다.

하루에 15명 내지 18명의 여성들이 낙태 시술을 받으러 오는데 마리아는 그 중에서 일곱명쯤의 여성과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 부분이 결심이 확고해서 어떤 설명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그녀의 조언이 받아들여지는 경우 일 주일에 두서너명의 아기가 생명을 구할 수 있기에 마리아와 동료들은 필사적으로 그 여성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어떠한 비난도 배제한 채 다만 그들을 이해하고 도우려고 노력한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낙태의 본질이나 그 심각성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으며, 진심으로 낙태를 원하지도 않는다. 대부분 그들이 처한 상황에 의해서, 남자친구의 권유에 의해서, 부모가 원하기에 낙태 시술대에 들어선다. 많은 여성들이 그들이 처한 주변 환경에 떠밀려 낙태를 선택하는것이 현실이다. 낙태에 관한 정보에 무지한 것은 물론이요, 자신이 잉태한 생명의 성장에 관해서도 무지하기는 마찬가지다.당연지사로 낙태가 모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오랜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정신적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될 지에 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낙태 시술을 받은 여성은 개인적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는데 이러한 고통을 "낙태 후 증후군" 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여성이 낙태를 포기하고 출산한다면 마리아와 동료들은 출산에 동반되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들은 "알파(ALPHA)" 라고 일컫는 낙태 반대 운동을 펼치며 소식지를 발간하고 있다.

다음은 낙태 시술 직전에 출산을 결심했던 한 젊은 엄마의 고백이다.

2006년 3월, 나는 낙태 시술을 받으려고 병원에 갔다. 남자친구는 어떤 경우에도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다. 나 또한 원치 않은 임신과 남자친구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반응 때문에 절망적인 상태였고, 한 인간의 삶을 책임지기에는 너무 어렸다.

낙태를 받으려고 간 병원 앞에서 마리아를 만났다. 그녀는 거기 길거리에 서서 낙태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녀는 병원에 들어가려는 내게 말을 걸고는 낙태 대신에 취할 수 있는 대안과 도움을 주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한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는 '생명의 집' 으로 마리아와 함께 갔다. 그리고 병원에 전화해서 예약을 취소했다.

마리아는 낙태가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자포자기해 있던 내게 자궁 안에 있는 태아의 사진을 보여주었고, 낙태 후에 동반될 수 있는 신체적 결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당시 살고 있는 곳에서 낙태를 하지 않고 임신한 상태로 계속 생활하기를 힘들어 하자 마리아는 내게 여덟명의 자녀가 잇는 어느 가정을 주선해주었다. 거기서 여러 주 동안 묵으면서 내 안에서 성장하고 있는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마리아를 동반하여 초음파 검사를 받으러 갔다. 태아의 모습을 보았을 때, 태아는 내 보호를 필요로 하는 한 어린 생명이라는 것이 진정으로 내 가슴에 다가왔다.

임신 상태가 진행되면서 나는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남자친구는 내 곁을 떠났다.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나는 아이를 낳겠다고 결정한 것을 단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운 내게 '알파'는 매달 지원금을 보내주었다. 그것이 없었다면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마리아는 나를 위해 온 힘을 다하고 할 수 있는 한 힘껏 나를 도와주었다.

그 해 11월, 극심한 산고 끝에 내 어린 딸 안젤리나를 품에 안았을 때 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행복감을 맛볼 수 있었다. 현재 내가 이 같은 기쁨과 행복의 순간을 맛볼 수 있는 것은, 낙태 시술 병원 앞에 서서 깊은 신앙심으로, 나와 같은 여성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기 위해 낙태 반대 운동을 벌이는 마리아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는 결정먹인 순간에 그들의 도움을 망설이다가 기꺼이 받아들였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 딸 안젤리나는 오늘 이 세상에 있지 않았을 것이고, 나 또한 정신적 육체적인 낙태 후유증을 평생동안 안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마리아'지 147호 <낙태는 해결책이 아니다>



낙태를 생각하신다면 꼭 읽어 보세요...
http://blog.naver.com/yourpower/20120345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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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January 11, 2011

낙태후유증,낙태후증후군,낙태 경험자의 증언-낙태의 본질과 심각성

본인의 아이, 혹은 주변분의 아이의
낙태 에 관해 생각하고 계신 분은

다음의 경험담들을 읽어보시고

(낙태 직전, 아기를 살리기로 다시 생각한 미혼 여성,
성폭행을 당하고 심한 번민끝에 아기를 낳기로 결심한 여성,
7만5천명의 아기를 낙태한, 낙태 찬성의 선봉에 섰던 낙태 전문의의 낙태 반대선언,
벼락을 맞고 죽었던 여성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경험하고 직시한 낙태의 끔찍한 진실..
그리고 자신의 아기를 뱃속에서 낙태한 여성들이 낙태 이후에 겪고 느낀 일들)


낙태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되셨으면 합니다....

낙태, 아니 태아살해는
비단 산모만의 문제가 아니고...
또한 흡사 어떤 질병처럼 단기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가벼운 일이 결코 아니며

그 영적, 정신적 후유증은
타인에게 낙태를 강요하거나 권유한 사람이든,
낙태를 동의한 아이 아버지든, 낙태 시술을 집전한 사람이든

낙태와 관련하여 책임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평생의 삶의 궤적에는 치명적인 상처를,
영혼에는 심각한 죄의 책임을 남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고, 깊은곳에 양심의 소리가 있습니다.
낙태는 결코 인간이 해서는 안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마음 깊이 어딘가에선
동의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수정란이었던 때가, 배아였던 때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작은 태아였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뿐입니다. 기억할 수 없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것이라고 여길 수는 없습니다. 충분한 환경만 주어지면, 우리와 다름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자랄 수 있는, 비록 형상이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지 수정란일 때부터 우리와 전혀 다름 없는 영혼을 지닌, 한 인간을,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작을 뿐이라고, 약하다고 죽일 수는 없습니다.

낙태, 루프, 시험관 아기 시술, 배아를 남용하는 실험... 모두
작디 작은 인간을, 필요와 편의에 따라 취하고 버릴 수 있는 물건으로 만들어 버리는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 그룬베르거(Maria Grundberger)는 임산부의 출산을 돕는 산파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근무시간이 아닌 때는 한 낙태 시술 병원 앞에 서서, 낙태를 하려고 결심한 여성들의 마음을 바꾸려고 애쓰고 있다.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꿔 아기를 낳게 하려고, 낙태를 막으려고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

"낙태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젊은 산파인 마리아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아니오" 라고 말하면서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출산을 택한 젊은 엄마들이 얼마나 고마워하고 기뻐하는지를 힘주어 말했다. 또한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낙태를 원했던 이들 모두가 얼마나 잘 극복해가는지도 전해주었다.

하루에 15명 내지 18명의 여성들이 낙태 시술을 받으러 오는데 마리아는 그 중에서 일곱명쯤의 여성과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 부분이 결심이 확고해서 어떤 설명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그녀의 조언이 받아들여지는 경우 일 주일에 두서너명의 아기가 생명을 구할 수 있기에 마리아와 동료들은 필사적으로 그 여성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어떠한 비난도 배제한 채 다만 그들을 이해하고 도우려고 노력한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낙태의 본질이나 그 심각성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으며, 진심으로 낙태를 원하지도 않는다. 대부분 그들이 처한 상황에 의해서, 남자친구의 권유에 의해서, 부모가 원하기에 낙태 시술대에 들어선다. 많은 여성들이 그들이 처한 주변 환경에 떠밀려 낙태를 선택하는것이 현실이다. 낙태에 관한 정보에 무지한 것은 물론이요, 자신이 잉태한 생명의 성장에 관해서도 무지하기는 마찬가지다.당연지사로 낙태가 모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오랜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정신적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될 지에 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낙태 시술을 받은 여성은 개인적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는데 이러한 고통을 "낙태 후 증후군" 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여성이 낙태를 포기하고 출산한다면 마리아와 동료들은 출산에 동반되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들은 "알파(ALPHA)" 라고 일컫는 낙태 반대 운동을 펼치며 소식지를 발간하고 있다.

다음은 낙태 시술 직전에 출산을 결심했던 한 젊은 엄마의 고백이다.

2006년 3월, 나는 낙태 시술을 받으려고 병원에 갔다. 남자친구는 어떤 경우에도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다. 나 또한 원치 않은 임신과 남자친구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반응 때문에 절망적인 상태였고, 한 인간의 삶을 책임지기에는 너무 어렸다.

낙태를 받으려고 간 병원 앞에서 마리아를 만났다. 그녀는 거기 길거리에 서서 낙태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녀는 병원에 들어가려는 내게 말을 걸고는 낙태 대신에 취할 수 있는 대안과 도움을 주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한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는 '생명의 집' 으로 마리아와 함께 갔다. 그리고 병원에 전화해서 예약을 취소했다.

마리아는 낙태가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자포자기해 있던 내게 자궁 안에 있는 태아의 사진을 보여주었고, 낙태 후에 동반될 수 있는 신체적 결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당시 살고 있는 곳에서 낙태를 하지 않고 임신한 상태로 계속 생활하기를 힘들어 하자 마리아는 내게 여덟명의 자녀가 잇는 어느 가정을 주선해주었다. 거기서 여러 주 동안 묵으면서 내 안에서 성장하고 있는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마리아를 동반하여 초음파 검사를 받으러 갔다. 태아의 모습을 보았을 때, 태아는 내 보호를 필요로 하는 한 어린 생명이라는 것이 진정으로 내 가슴에 다가왔다.

임신 상태가 진행되면서 나는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남자친구는 내 곁을 떠났다.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나는 아이를 낳겠다고 결정한 것을 단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운 내게 '알파'는 매달 지원금을 보내주었다. 그것이 없었다면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마리아는 나를 위해 온 힘을 다하고 할 수 있는 한 힘껏 나를 도와주었다.

그 해 11월, 극심한 산고 끝에 내 어린 딸 안젤리나를 품에 안았을 때 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행복감을 맛볼 수 있었다. 현재 내가 이 같은 기쁨과 행복의 순간을 맛볼 수 있는 것은, 낙태 시술 병원 앞에 서서 깊은 신앙심으로, 나와 같은 여성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기 위해 낙태 반대 운동을 벌이는 마리아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는 결정먹인 순간에 그들의 도움을 망설이다가 기꺼이 받아들였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 딸 안젤리나는 오늘 이 세상에 있지 않았을 것이고, 나 또한 정신적 육체적인 낙태 후유증을 평생동안 안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마리아'지 147호 <낙태는 해결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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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네이버 지식인에서 올린 질문글을 퍼온글입니다.

스무살 대학생입니다..
9월 1일..뱃속에 있던 생명을 지웠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잠을 제대로 자본적이 없습니다..
수술을 하고나서는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해놓고
남자친구는 떠났습니다..
자살하는꿈도 꾸고 매일매일 애기목소리가 들리고 전 남자친구도 나오고..
하루라도 꿈을 안꾸는 날이 없습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정말 죽고싶어서 손목도 그어보고 약도 먹어봤습니다..
죽는게..그렇게 쉽지많은 않더군요..
부모님생각..친구들생각 하면서 겨우 버티고있습니다...
우울증도 점점 심해지고있고..불면증도 걸려서 너무 힘이듭니다....
낙태후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더군요...
낙태후 증후군이 온것같아요...
감정기복도 심하고 평소엔 잘 웃고다녔는지 도저히 웃음이 나오질 않습니다..
매일 밤마다 무릎꿇고 하늘로간 애기한테 빌면서 웁니다...
그래도 엄마를 용서하지 않는걸까요...
왜 저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지....
혼자 두고 떠난 전 남자친구도 너무 원망스럽고...
불쌍한 애기를 하늘로 보낸 죄책감도 너무 크고..
하루하루를 정말 사는것같지않게 삽니다..
혼자있을때마다 죽고싶은생각밖에 안들고...눈물만 나요....
모든걸 다 잃은 것 같은 느낌입니다...
하늘에서 애기가 엄마를 너무 찾고있는것같아요..
가끔은 갑자기 몸 주위에서 한기가 느껴지기도 하구요..
죄없이 죽어간 아기가 잠깐이나마 저한테 왔다가 가는것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요즘 너무 힘이듭니다...
얼마나 가야 무뎌질 수 있을까요.....
정말 죽고싶은 마음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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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가 지금 과연 낙태후유증이 맞는걸까요?
맞다면 이걸 어떻게 해야하는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조언좀 부탁드려요
저는 낙태 경험이 두번있어요..
1월말에 한번 5월중순에한번
이번해니까 둘다 얼마 안됬죠..
시간이 지나고 아기에 대한 그리움이 사그라 들지도 않고..
괜히 계속 임신이 하고 싶어요
임신을 하면 안된다는걸 알면서도 임신을 하면 아기를 곧장 지워야 한단걸 알면서도
임신을 하고싶고..
그래서 관계도 계속 갖고 피임은 안하고
저도 이러면 안된다는걸 알고있는데도 계속 이러게 되요..
가끔..임테기를 사서 임신이 됬나 보고 한줄이 나오면 괜히 혼자 실망해요..
어떻하죠?
저..아직 고등학생이라서 임신하면 절대 안되거든요..ㅠㅠ
아직 고일이라..
아기를 지우지 않았으면 아기가 태어날 수 있는 출산 예정일이라던지 아기 백일..이런걸 신경쓰게되고
아기 지운날짜...이래저래 아기생각만 하네요
자기전에 한두시간정도 아기를 생각하느라 잠을 못자고..
계속 아기만 생각하게 되요..ㅠ
지나가다가 아기들을 보면 나도 조금있으면 저런 아기가 있을 수 있었는데..
내가 애를 지우지 않았으면 내 배도 이만큼 불렀겠지?
이런 생각들을..하고..
첫째의 예정일이였던날 저혼자 편지를 쓰고 저혼자 애기옷을 샀어요ㅠㅠ
아직도 아기 초음파 사진이 잊혀지지가 않아요ㅠㅠ
다른 아기사진들을 찾아보고 이것저것 아기에 관련된것만 보고..
수술을 하고 나서 꿈도 바뀌었어요..ㅠㅠ
아기가 너무 갖고 싶어요 지워야 한단걸 알면서도..
이제는 없는 ..아기가 있었던 배를 만져보면서 생각도 하고
계속 임신을 하고싶고.......ㅠㅠ
아기들을 보면 어찌나 그렇게 이뻐보이는지..
중절수술 동영상..이런것들을 가끔 찾아보게되고..
괜히 수업시간에 임신 중절수술 피임 이런것에 수업을 하면..괜히..저혼자찔리고
학교에서 이것저것 시키면 아기에게 연관시키게 되더라구요..
또 제가 수업을 듣는게 있는게
거기서 알이 있는데 알이 쪼개진 모습과 알이 쪼개지면 무엇이 나올지 그려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아기를 그렸는데..
선생님이 너 동생갖고싶니?
라고 하셔서..아니요..저는 제아이가갖고싶어요..
라고했더니 의외라면서..막 그러셨거든요ㅠㅠ
여태까지 돈을 그리거나 다른 전자기기를 그리는 애들은 많이 봤어도
아기를 그리는 아기는 처음봤다고..
그게 자기안에 내재되어 있는 심리래요..ㅠㅠ
근데 제 주변에 있는 다른아이들은
다 돈이나 금이나 엠피쓰리 디카 옷 이런걸 그려넣었거든요..
아..제가 진짜 낙태후유증이 맞는건가요?
아기를 잊고싶어요..
생각하면 막 마음이 시리다고 해야하나?
막.......무언가가 때린것처럼 징...한 느낌이 계속 오구 눈물도 나고..
리틀맘들이 부럽고... 막 그래요............
아...저진짜 어떻할까요?ㅠ
하늘나라로 간 아기한테는 너무 미안해요..............
진짜 보고 싶은데 돌이킬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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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정말 세상에서 제일 할짓이 못되는겁니다..
저도 어쩔수없이 낙태한 경험이있었습니다.그땐 저희살림이 말이아니어서 결코아이를 낳을수없었거든여..

정신적으로도 힘들었고 몸도 많이 망가졌습니다.

낙태하기전 주사에약까지 먹으면..아랫배와 성기등이 밑빠지는듯 아프고 몇시간씩 지속됩니다.
수술할땐 마취상태라 수술고통이없지만 깨면 두들며 맞은것처럼 아프고.. 성인이 아기기저귀를 차고있지요.. 피는 아이낳는것처럼 길게는 일주일정도 기저귀차고있어야 할만큼 나올껍니다..

아이낳은거랑 똑같기에 젖도나오고..젖몸살도 올겁니다. 수술한지 얼마나됬다고 찬바람을쐬신건가요..
못모르고 양말도안신고 한겨울에 빨래한게 지금도 무릅과 허리가쑤시는데..지금은 몰라도 수년지나면..
비가오려나 하고 쑤실겁니다.
아이낳은 산모들 최소한 1주일은 뜨신방에서 지지면서 미역국먹고 찜찔하고 붓기풀고 3개월은 안정하면서
관절이나 느슨해졌던 몸이나 질속의 오로등이 빠지고 제자리를 찾는데..그정도 걸려서 아이도 엄마도 100일을 치루는거거든여...

그때낙태탓인지.. 10년이지났는데..아이가 없습니다..
잘들어서는분은 눈만봐도 아이가 생긴다지만...

미역국 많이 끓여먹게 해주시고,,영양제나 뼈에좋은 음식 많이 드시라 권하세여...하혈끝날때가지 목욕금물이구여.. 땀이날정도로 푹 지지고 생활해야 몸이 돌아옵니다.이때 제대로 조리를못하면..평생 원망들으며 사실거에여..

왜그때 제대로 조리를못했는지..가끔그때생각하면..밥먹다가도 목이콱막히듯 마음이 아픕니다.
잘해주세요,,특히 먹고싶다는거 생각안날때까지 사주십시요..특히 애긴없지만 과일을요..
전그때아무것도 못먹었거든여..얼은라면 데워먹으면서 춥게보냈었어여..지금생각하니 또 눈물이 나오네여..너무서러웠고 가난했고 아팠던때라..목이매여요

여자한테는 절대잊지못할상처니까요..여잔 다똑같아여..절대 죽을때까지 못잊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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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신채민
게시번호 : 313

전 20살의 꼬맹이 엄마에여...
저두 낙태을 생각해본적이 있습니다...
19살때... 정말 모든게 두렵구 무서웠어여...
하지만 아이을 영원히 잠들게 하는것보단 지금의
제 모습이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낙태을 생각하시는 모든 여성분들,,,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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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토론방에 올라 온 글입니다.게시번호 : 525
젠장!!잊고 싶습니다.지워버리고 싶습니다.그저 너무나도 지독한 악몽을 꾸고 일어난것처럼그냥 그렇게 꿈인듯 잊어버리고 싶습니다지워버리고 싶습니다아우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다 잊어버리고 살고 싶은데어째서 잊혀지지 않는거지요?어째서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거지요?이렇게 까지 크게 벌을 받아야 할 만큼 잘못한건가요?벌이 너무 큽니다.내 남은 인생을 이렇게 망치게 된다는건!!너무 잔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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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번호 : 631이름 : sj
이 글을 읽고나서 한 참을 생각했습니다.많은 이들이 낙태전과 후에의 죄의식과 괴로움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큰 죄의식 없이 낙태한 이도 낙태이후에는 그 괴로움으로 인해 삶의 포기까지 생각할 정도이니까요.지금 김진씨는 인생에 있어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가장 큰 기로에 서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고 준비할 가장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구요.저도 낙태 경험이 있습니다.임신 5주째라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하지만 그후에 제 목숨을 주고 아기를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하고싶었습니다. 여기 있는 글들을 보면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저 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다고 느낍니다.낙태전에는 임신 4, 5주 정도의 태아가 설마 사람이랴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낙태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태아는 진정 사람이었고 제 자식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이목도 아니고, 나의 잘난 미래도 아니고, 다만 내가 잉태시킨 내 아기의 생명이었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지금의 나이에 아이를 낳아 키운다면 어려운 점이 하나, 둘이 아니겠지요.당장 부모님, 학교, 친척 모두 두려움의 대상이겠지요.하지만 남자친구가 진정 미래를 같이 할 수 있다면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봅니다. 또 본인의 의지도 중요하겠지요.저의 장인장모님은 스무살에 제 집사람을 낳아 길렀는데, 정말 용기있고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됩니다.김진씨께서 당장 대학을 준비할 수 없다하더라도 1,2년이 늦어진들 그것은인생에 아무런 마이너스가 될 수 없습니다.반면, 낙태를 한다고 가정하면 겉으로는 이전과 같을 지 몰라도 본인이 느끼는 현실은 더이상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이 아니니라 확신합니다.아기를 보낸 걸 후회해도 절대 아기는 되돌아오지 않습니다.그렇게 아기를 그리워하며 살아간다면 대학준비도 제대로 되지도 않을뿐더러 그 고통이 언제까지 따라다닐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제가 당장 김진씨의 입장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글을 쉽게 쓴다고 생각하실수 있을지 몰라도 정말 심사숙고한 후 말씀드리는 겁니다.어느쪽으로 가도 후회는 있겠지만, 극복하며 살아갈수 있는 후회와 평생 죄의식속에 짊어지고 가야할 후회가 있습니다.둘이라면 현실을 부딧치고 이겨 나가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지금은 아기가 모든 앞길을 가로막고 괴롭히는 짊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면 이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남자친구와 뜻을 모으고 용기를 가지시어 부모님과도 이야기 했으면 합니다.하지만 선택과 이후의 책임은 모두 본인들의 몫입니다.이제는 그러한 나이가 되었으니까요.좋은 결정을 하셨다고 생각된다면 꼭 글을 올려 주세요.혹시 제가 도울일이 있다면 메일보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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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토론방에 올라온 글입니다.이름 : sj게시번호 : 1032
먼저 제가 여기에 거의 매일 들어오는 이유를 말씀드립니다.저는 낙태후에 비로소 태아는 이미 태어난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지녔고 그들의 인생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저의 슬픔이, 여러분의 슬픔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한 사람(그것도 자기자식)의 목숨과 인생을 시작하자마자 송부리째 없애버린다는 것...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어쩌면 이미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죽이는 것 보다 더 잔인한 일이되겠죠.
낙태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낙태만이 최선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낙태는 우리사이에 보편화되었고 맹장수술처럼 몸의 불필요한 일부를 떼 버리는 듯 인식되어 갑니다.낙태를 고민하는 사람들도 문의하는 내용은 일단 애를 지운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그렇기 때문에 애를 지워도 된다라는 대답을 더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자신의 현실을 위해선 아기의 생명정도는 포기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상식은 낙태경험한 이들부터 바꿔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최종선태은 당사자들이 하겠지만 낙태만이 최선책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용기를 줘야 합니다.아울러 이후에 여건이 된다면 미혼모나 입양아, 고아 등에 대해 우리들이 해야할 일을 찾아 나서야 됩니다.
저는 어린나이에 애를 낳은 여러 꼬맹이 엄마들과 직간접적으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낙태를 모두 생각했다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애를 낳은 사람들입니다.그렇지만 그들이 애를 낳은 것을 후회하고 있을까요?대부분 그들은 애를 너를 사랑하고 이뻐하고 있으며, 애를 낳기전에 자신이 낙태를 생각한 것 자체가 얼마나 죄스럽고 애한테 미안한 일이였던가 고백합니다.
낙태는 옳지 못하지만 현실적으로 어쩔수 없다라고 하는 이중적인 사고와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그만큼 괴로워하고 그만큼 죄스러워했다면 이젠 현실보다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에 대해 우리들은 진지하게 생각했고 그 것을 실행과 연결시켜야 합니다.
무엇이 현실에 맞고 무엇이 현실에 힘든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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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가 얼마나 본인에게 끔찍한 것인지,
잘 모르신다면 아래 글과 링크글을 부디 꼼꼼히 읽어봐주세요...

부득이하게 임신을 하셔서
도저히 책임 질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9개월 동안만… 아기를 뱃속에 품어 주세요…

지금 당신에게 부모님께서 허락해주신 그 삶 과 같은 삶을 허락해 주세요


그것이 그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닥쳐올 엄청난 일들을…
지금이라도 막을 수 있는 최후의 수단입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많은 부모들과 달리
지금 망설이고 있는 당신은 막을 수 있습니다..


뱃속에 데리고 있다가…건강하게 출산을 하고…
그 이후에 영아원이나…다른 곳에 보낸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쉽게 자신의 아기를 죽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훗날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며
그 무죄한 아이의 처참한 죽음의 대가는 당신에게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낙태 후유증, 낙태 후 증후군이라고 조금만 검색해 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낙태경험자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라도... 꼭 다시 생각해주세요

그 아이가 부담이 되고… 앞으로 평생 책임을 못진다구요?
그저 낳자마자 영아원에 보내지거나 설령 길에 버려진다고 해도
지금… 엄마의 뱃속에서 난도질 당하며 죽는 것 보단 백번 천번 낫습니다.


특히 어린 부모들.. 부모님에게 들키면 안되어서 몰래 낙태를 감행하려 하는데…
부모님에게 잠시 혼나는 것은 낙태로 일어날 더 끔찍한 일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어려도..
설령 중학생이더라도… 제발 낙태만은 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릴 때일수록 그 피해는 더 치명적입니다.


아무리 어려도... 아무리 상황이 여의치 않아도...
1년동안학업을 중단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더라도...

낙태 이후의 자신에게 불러 올 수 있는 재앙에 비하면

정말로 ...
그저 조금의 손해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책임질거냐, 학업을 중단해야 한다는데, 남사정도 모르고
애기 책임질거 아니면 그런 말 하지 말라..

그럼 그분들께 당신들은 이렇게 쉽게 아이를 죽이는 쪽으로 부추기고나서
나중에 그 책임을 다 어떻게 떠안으려고 하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 아이가 죽지 않게... 그분들이 책임 못지고영아원에 보내지기만이라도 하도록
막는것이제가 그 아기한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입니다
죽이는것이 그아이를 책임지는것인가요?
또한 이것은 산모의 건강과 행복을 위한 책임이기도 합니다.
낙태 이후에 산모와 남자와 가족의 삶이 어떻게 될지
어떻게 장담 하시고 이렇게 쉽게 말하시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글을 남기지 말라 하시는것은
낙태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불러올지 모르고
가볍게 생각하시는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의 기간에는
사회생활이나 다른 모든것에는 관심을 끄시고 오직 아기와 자신의 몸만 생각하세요
그것이 그 아기에 대한 최소한의 엄마로서, 아빠로서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입니다.


임신해서 주변에 부끄러운 것…
이런것은 낙태하고 나서의 끔찍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 부끄러우시면 9개월동안 병을 핑계로 잠적하세요.
9개월동안만 부모님의 보호아래 안정을 취하시고


도저히 갈곳이 없다… 미혼모 센터에선 여러분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1년동안 숙식 분만 산후조리등이 무료로 제공됩니다.

삶에 여러가지 상황이 안좋으신분들은 더더욱
모든것을 멈추고.. 아이를 위해 자기를 위해 1년만 쉬는 기간을 가지시길 부탁 드립니다...


미혼모시설은 본인의 신원확인만 가능하면 입소하실 수 있습니다. 주민등록증이나 이런것을 가지고 계시면
입소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입양시 부모님 동의가 아닌 아기 엄마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주민센터에서 필요한 서류를 가지고 입소하며, 숙식, 출산, 산후조리가 무료료 제공되며
보통 1년입소가 기본(출산 후 6개월) 미성년자 입소 가능합니다)

마리아의집

http://www.maryhome.or.kr/

국내나 해외에 입양된 아이들이 양부모 가정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사진과 소식을 보내오거나 방문한 사진을 볼 수 있네요..
이 아이들이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가는것을 보니,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 부모들이 얼마나 잘한 결정인지 다시금 느껴집니다...

마음자리
성가정 입양원도 함께 운영되고 있습니다.
http://www.maumjary.com/

자모원 http://www.jamowon.or.kr/



(미혼모자 시설의 경우 미혼모의 출산을 돕고 출산 후 일정기간 (6개월미만) 동안 아동의 양육지원을 돕고 숙식을 제공하는 시설입니다.

미혼모자공동생활가정의 경우 2세미만의 아이를 양육하는 미혼모에게 일정기간의 숙식보호와
자립지원을 제공하는 기관입니다.)


전국 미혼모 센터, 미혼모자 공동생활 가정 안내
http://blog.naver.com/yourpower/20120450717


낙태 후 평생 임신이 불가능 할 수도 있고
낙태 이후에는 당신의 삶이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질 지…
어떻게 절망과 우울 심지어 자살 까지 갈 수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자신의 앞으로 삶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서라도 다시 생각해주세요

여성분의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낙태는 절대 해서는 안됩니다…
낙태가 얼마나 위험한 수술인지. 낙태를 하다가 죽는 여성도 많이 있습니다.
친구가 낙태수술을 하다가 식물인간이 된 경험담도 있었습니다.

낙태의 고통은 출산의 고통과 같거나 그 이상이며
오히려 낙태후의 후유증은 출산후와는 비교도 할 수없이 나쁩니다…

출산과 몸조리를 잘하고 건강이 많이 좋아지는 여성은 있어도..
낙태는 어떠한 경우에도 여성의 몸에 치명적입니다.


그 후유증은 평생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로 남고…
여성의 몸에, 정신에, 마음에, 상상을 초월할 악영향을 미칩니다.…
아래의 링크 글들을 자세히 읽어보시고
낙태의 현실을 알길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기를 죽이도록 선택한 남성에게도…
분명 드러나진 않을지라도 앞으로 살아가는 삶에 그 영향이 분명 있을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설령 성폭행을 당했더라고 하더라도
<낙태> 만은 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상처를 겪지 않을 최우선입니다..
그것이 현실 입니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좋던 싫던
당신의 아이가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 입니다
이것은 여성분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닌 남성들에게도 똑같습니다..


어느 미혼모의 수기

늦은 시간 퇴근길에 어떤 남자에게 짓밟혀 제 인생이 구겨져 버렸습니다.
그 사건이 한 바탕의 악몽이어서 깨어나면 깨끗이 지워지기를 몇 번이고 바랬지만
현실은 버릴 수도 피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절망과 슬픔으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중에
원수 같은 그 사람의 씨는 뱃속에서 자꾸 자라고 있었습니다.
저는 절망과 슬픔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몸과 마음의 상처나 후유증 같은 것을 생각할 것 없이 낙태를 하고 싶었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기에 친구나 가족에게 상의하고 싶었지만
부끄러움과 자존심이 이를 허락치 않았고
그들에게 부정한 미혼모로 비춰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런데, 당장 낙태를 하지 않으면 눈앞에 닥치게 될
결혼 문제, 직장문제, 그리고 가문의 체면문제들이 저를 불안과 공포를 몰아
저로 하여금 낙태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푼푼이 모았던 적금을 해약하여
이 병원, 저 병원을 기웃거렸습니다.
그러나 병원의 문턱에서 용기가 나지 않아 힘없는 발걸음을 되돌리곤 했습니다.
"네가 살려고 어린 생명을 죽이려느냐?"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이 죄어 왔지만
그 말씀을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 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제가 멀리했던 하느님께서 제 양심을 일깨우시는 안타까운 호소였습니다.
그럴 즈음에 산부인과에 근무하시는 상담원 선생님을 만나
낙태의 후유증과 생명의 존귀함에 대해 알게 되어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새 생명이 태어나는 대신 직장을 포기해야 했고, 또한 약혼자의 품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날을 고통과 갈등으로 보낸 세월이었지만
하느님께 의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그리고 자모원의 생활을 통하여 점차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되었고
아기가 태동할 때마다 한 생명의 절규를 듣게 되었습니다.

가족 모두에게 고통과 슬픔을 주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해결이 되었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생명의 귀중함을 깨달았고,
한 생명을 살렸다는 자부심도 갖게 되었습니다.

순결을 잃었어도 마음만은 빼앗기지 말고 과거를 접어두고
늘 새롭게 마음의 중심을 찾으라는 김 신부님의 말씀을 자주 상기합니다.
이제 상대를 용서하는 마음도 생겼습니다.

산고를 겪으면서 폭풍우 속의 칠흙밤의 단말마 같은 고통을 통하여
저는 영혼의 신선함을 되찾았고, 아기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자모원 자료실)

http://www.jamowon.or.kr/jamowon/zboard.php?id=news

다른 수기들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아직도 낙태를 해야된다는 생각이 드시는 분이 계시더라도
이 웹툰를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겁니다....


태아는 뱃속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55143&no=114&weekday=tue



낙태 후유증 에 관해…( 중절수술이 아기 엄마와 아빠에게 미치는 영향…)


낮아진 자기 존중의식
죄책감
우울증
감정 기복,에너지 고갈, 관심 결여,잦은 울음, 명백한 결정 능력 결핍, 일상적 기분저하
자살 생각, 자살기도
관계성 파괴
악몽, 수면 불안, 과거 회상, 분노,

약물남용, 폭음, 난잡한 성, 성기능 실조
공포증과 강박장애
감정 표현 불능


자세한 일화들이 나와있으니 꼭한번 들어가서 읽어보세요..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7&dirId=7011401&docId=152587&qb=64KZ7YOc7ZuEIOymne2bhOq1sA==&enc=utf8&sect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gfYWUg331yosst1Iq4Zssv--135197&sid=TSvqJAXKK00AABFhVl0


제발 낳아서 입양시키더라도
아기를 살려주세요


아기가 살려달라고 웁니다.
살고싶다고요...


한번 선택하시면 그 후엔 돌이킬수 없고 훗날 많이 후회하시게 될것입니다...

낙태는 가장 끔찍한 살인입니다
표현이 격해서 죄송합니다.


가장 고귀한 생명 그것도 귀여운 아기...아무 죄도 없는 아기를
난도질해서 죽이는것은 어떻게도 미화될수 없습니다...

당신의 아기가 바로 자신의 어머니의 뱃속에서 난도질당하고 비명을 지르며
죽어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아기는 죽어서 하늘나라로 가지만
엄마의 몸과 마음은 의식할 수 없어도 황폐해집니다...


훗날 그 영향력으로 아기엄마와 아빠의 영혼은 깊은 우울과 불안 , 공허와 절망에 시달립니다..


특히 엄마의 건강, 육체 마음 영혼에 엄청난 큰 상처가 남고요
낙태 후 증후군이라는것을 검색해보시면 조금이나마 아실수있을겁니다


수많은 낙태경험자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라도... 꼭 다시 생각해주세요


낙태를 하려다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럽고 금쪽같은 아이를 어떻게 죽일뻔 했을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해 합니다..
낙태를 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중 후회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으며
낙태후 후회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 어리셔서 키우지 못하시더라도
적어도 낳아서 좋은 가정에 입양시켜주세요

훗날 그 아기가 자신에게 허락해준 그 삶을 준걸 마음깊이 감사할것입니다.
좋은부모에게 입양되어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

지금 님에게도 부모님께서...허락해주신 그 삶 과 같은 삶을 허락해 주세요
그 끔찍함을 당신은 지금 막을 수 있습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많은 부모들과는 다릅니다!


살해당하지 않고 양부모에게서라도 클수있게
아니 고아원에서 살더라도 적어도 살 수 있게 해주세요


(어떤분들은 말합니다

아이하나 키우는게 정말 돈도 많이 들고 장난아니게 힘든데 그걸 어떻게 책임질 소린가...
게다가 여자 혼자서 아이 데리고 사는게 사회적으로 얼마나 힘든지 모르느냐...

그 책임을 못지시는 부모라면 적어도 생명만이라도 살려달라는 얘기입니다.
책임 못진다고 덜컥 죽이는것은 도데체 어떤겁니까?


낳아도 상처가 된다...
내 아이가 먼곳에서 자라는게 얼마나 심리적으로 상처가 되느냐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도저히 아이 키울 상황이라서 입양보내서
내 아이가 먼곳에서 자라는 심리적 아픔이 있을수 있을지라도..

그래도 그건 어려운 상황에서 아기를 살리신 거잖아요...
뱃속에서 아이를 죽이고 난 후의 죄책감에는 비할바가 못된답니다...


부디 훗날에도 후회 안하실 선택 하시길 바랍니다..
키우실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적어도 생명만은 살리시길 .... )



낙태가 훗날 자신에게 어떤 영항을 미칠 수 있는지…



이 글은 실제로 콜롬비아의 한 여성이 벼락을 맞아 죽은 후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그 경험담을 적은 것입니다.



http://saveyourbaby.blogspot.com/2011/01/blog-post.html



꼭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낙태는 살인이다.
1973년 버나드 나탄손은 뉴욕에 있는 성 루카병원의 산부인과 과장이 되었다. 그때 태아를 관찰할 수 있는 초음파 기기가 최초로 그곳에 설치되었다. 초음파 기기의 힘을 빌려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았던 그 순간의 감동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으로 우리는 인간의 태아를 볼 수 있었고, 진단하고 관찰하며 그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 …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보면서 나는 아주 강한 인상을 받았다.”
초음파 검사의 도입은 인간의 태아에 대한 그의 시각에 극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초음파 기술 덕분에 태아도 정상적인 인간 생명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 기관의 기능을 측량할 수 있고, 태아의 무게를 재거나 나이를 결정할 수 있으며, 삼키고 마시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자거나 깨어나는 것은 물론이요 모든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었다. 태아는 세상에 태어난 아이와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원하는 낙태”에 더 이상 설득되지 않았다. 그는 낙태 수술 횟수를 철저히 제한했으며 의학적으로 꼭 필요한 경우에만 응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낙태 수술을 한 것은 1979년이었다.
1984년부터 그는 낙태에 더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래서 감정을 배제한 채 기구를 여성의 자궁에 삽입하고 태아의 살점을 찢고 도려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는 낙태 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하루에 20회 이상씩 낙태 수술을 했던 친구에게 부탁하여, 낙태 과정을 필름에 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스튜디오에 앉아 필름을 돌려보았으며 그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충격을 주었다.”
그 자리에서 친구 의사도 더 이상 낙태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할 정도였다. 그동안 수없이 낙태 수술을 했지만 그 실상을 객관적으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필름은 전문가의 손을 거쳐 영화 ‘침묵의 절규’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 영화는 아무런 죄도 없고 방어력도 없는 피조물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하고 잔인한 범죄의 기록을 보여준다. 그 영화에서 12주된 태아는 자신의 살점을 찢어내고 흡입하는 기구들을 상대로 필사적인 방어를 되풀이한다. 그 영화는 1985년 3월 1일 미국 플로리다에서 처음으로 상영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낙태를 지지하는 자들은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으며, 언론 매체도 진실을 가리려고 시도했다. 한 TV 방송국은 이 영화의 방영을 거부할 뿐 아니라 생명 보호 광고 시간도 허락해주지 않았다. 이것은 언론 매체들이 죽음의 문화를 위해 존재하는 세력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버나드 나탄손 박사는 학문의 객관적인 토대를 바탕으로 자신의 마음을 열었다. 그는 인간의 생명은 잉태의 순간에 시작되고, 낙태는 살인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였다.


어느 낙태 전문의의 개종 이야기... 출처
http://blog.naver.com/perpe64?Redirect=Log&logNo=90095900137









Sunday, January 9, 2011

낙태가 당신에게 훗날 어떤 결과를?-사후체험자가 증언한 낙태, 루프의 진실- 여러분도.. 수정란이던 때가, 태아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다음은 콜롬비아의 한 여성(글로리아 폴로 오르티츠)이 벼락을 맏고 죽은후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경험한 것들을 적은 책"벼락을 맞았습니다" 에서 발췌한, 낙태, 루프에 관한 구절들입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050792

서문 발췌

<.......이 책은 1995년에 생겼던 사건과 그 후에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글로리아 폴로 박사는 콜롬비아 출신으로, 사고를 당해 "죽었던"여성 치과의사입니다. 그 사고로 그녀는 매우 위중한 상태에 빠졌고, 며칠 동안 혼수 상태에 있었으며, 의료 장치를 통해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를 담당하던 의료진들은 이미 그녀를 포기했었고 그래서 모든 조치를 중단시킬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시점에 하느님께서 그녀의 삶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녀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에 이 세상이 아닌 그곳, 바로 저 세상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하늘나라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영적 세계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지상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제 친구 에스텔라와 그녀의 가족들이 휴가를 떠났는데 그때 이미 그녀는 임신 5개월째였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왔을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임산부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배가부른 임산부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시체 마냥 말라 있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창백해 보였으며 그렇게도 명랑하고 외향적이며 생기발랄했던 소녀의 모습을 더이상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예전의 제 친구 에스텔라가 아니었습니다...제가 친구에게 낙태시술을 받을 때 마음이 아프지 않았는지 고통스럽지 않았는지 물었을 때, 그녀는 반어조로 대답했습니다.


"내가 왜 슬프게 지내야 하지? 그 정도의 아픔을 참아내는것은 내가 평생 그 아이를 데리고 헤쳐나가야 하는것에 비하면 결코 고통이라고 할 것도 없어! 그것으로 문제가 그냥 간단히 해결됐잖아!"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녀의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그 친구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심한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그녀는 환각제를 복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저는 16세 때 첫 약혼자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의 압력이 다시 거세졌습니다.그 때 아직 처녀였던 저는 그들 가운데 낀 악당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약혼자가 생겼으니 잘 됐다며 저를 다시 몰아붙였습니다. 그때까지는 결혼 상대자가 없으니 하는 수 없다는 변명으로 버텼지만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친구 에스텔라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만일 나도 너처럼 임신을 하게 되면 어쩌지?"

그녀가 말했습니다.

"괜찮아.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요즘 다른 방법이 생겼거든. 콘돔 말이야."

자기 때는 약만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러면서 피임약 다섯 알을 줄 테니 안전하게 하기 위해 한번에 다 먹으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리고 콘돔을 사용해야 하며, 그러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이런 황당무계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친구들과의 사이가 나빠질까 봐 더 신경이 쓰였습니다.

마침내 일이 벌어졌을 때, 순결을 잃어버린 처녀는 그 자신을 잃게 된다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옳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안에서 무언가 사라져 버렸다는 공허함이 저를 압도했습니다. 마치 다시 되찾을 수 없는, 다시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친구들이 그토록 떠벌렸던 "흥분된 경험" 을 통해 제게 남은 것은 단지 실망, 후회, 엄청난 슬픔 뿐이었습니다.

섹스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도 젊은이들이 그것에 열광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제 느낌으로는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

저는 친구들에게 화가 났고 그래서 매우 성을 냈습니다. 또 제가 그처럼 멍청하게 그들의 말을 따라서 저 자신이 원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저 자신에게도 무척 화가 났습니다.

제 친구 에스텔라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첫 성관계로 인해 저는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16세 소녀가 임신이라는 현실로 감당해야 하는 두려움과 걱정을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임신과 동시에 제 몸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걱정이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뱃속 아기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점점 강해졌습니다.

저는 약혼자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크게 당황하며 어찌할 줄 몰라 했습니다. 저는 열여섯 살, 그는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이렇게 말해 주길 기대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당장 결혼하자."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런 일로 우리의 인생을 망치면 안 되니 아이를 지워 버리자"고 했습니다.

런 대답을 듣고 난 후 저는 계속 기운이 쳐져 걱정하고 슬퍼하며 지냈습니다. 정말 슬펐습니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라며 자신 있게 말했던 친구 에스텔라에게도 화가 치밀었습니다.

이런 저를 보며 에스텔라가 제게 낙태를 권했습니다.

"걱정 하지 마.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난 벌써 몇번이나 그런 일을 겪었잖아. 처음에는 좀 슬펐지만, 두 번째는 훨씬 수월했고, 세 번째는 아무 느낌도 없었어."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집에 갔을 때 엄마가 이 상처를 보기라도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너는 상상도 못할 거야. 나 때문에 엄마가 죽을 지도 몰라."

그녀는 저를 진정시키며 말했습니다.

"요즘은 그렇게 크게 째지 않을 거야. 내게 난 칼자국은 아기가 이미 많이 자랐기 때문에 그렇게 큰 거였어. 그 때 이미 5개월째였지. 하지만 네 경우엔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것은 겨우 손톱만큼 작을 테니깐. 엄마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할 거야."

아,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얼마나 엄청난 비극입니까! 사탄은 우리가 이런 엄청난 일을 이렇듯 축소해서 받아들여 망치도록 합니다. 마치 그 어떤 일도 결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결코 의미를 둘 필요가 없는 것처럼 여기도록 말입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니 낙태는 별 일이 아니란 듯, 그저 평범한 일상에 지나지 않는 듯 여기게끔 만들어 버립니다.

예전의 저처럼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순결한 젊은이에게 낙태가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후일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젊은이들을 이렇게 부추기면서 이를 믿도록 합니다. 섹스는 단지 즐기기 위한 것이며 그것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 하지만 사탄이 왜 그렇게 하는지 압니까? 왜 그가 사람들을 그렇게 유혹할까요? 수 많은 다른 이유가 있지만, 그는 인간의 희생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고의적인 낙태를 통해 이 세상에서 자신의 힘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낙태를 하기 위해 집에서 멀리 떨어진 병원에 갔을 때 제가 얼마나 걱정하고 죄책감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의사는 저를 마취시켰습니다. 그리곤 다시 깨어났을 때 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더이상 예전의 제 모습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의사는 아기를 죽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그 아기와 함께 죽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책"에서 과거의 이 모든 일을 보도록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지상의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일들을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의사가 낙태 수술을 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가 보도록 해 주셨습니다...


의사가 집게 같은 것을 가지고 제 뱃속의 아기를 집어서 조각내는것을 제 눈으로 생생하게보았습니다. 그때 아기는 사력을 다해 울었습니다. 필사적으로 있는 힘을 다해 울었습니다.


인간은 어머니의 태중에 잉태되는 즉시 자신의 영혼을 받는데 완전히 어른처럼 성숙한 영혼입니다. 이 영혼은 완전하며 완전히 성숙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육체처럼 성장하는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을 완성된 상태로 창조하셨습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하나가 되자 마자 그 안에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광채가 뿜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빛은 마치 태양처럼 빛이 났는데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끝없는 사랑의 광채에서 나온 것입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바로 그 순간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영혼은 이미 완전히 성숙하게 다 자란 상태입니다. 영혼은 완벽하며 하느님의 모상 그 자체입니다. 영혼과 하나된 그 어린 생명은 하느님의 심장에서 나온 성령에 잠깁니다. 임신한 여자의 자궁은 주님과 새로 창조된 영혼과 이 빛이 하나가 되면서 형성된 광채로 가득 찹니다.


낙태시술병원의 의료진들, 곧 살인자들이 아기를 집게로 잡아 조각낼 때 맙소사, 새로 시작된 그 작고 여린 생명이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을 치는지....


낙태를 한 후 양심의 가책을 느끼던 제게 악령들이 제 아이의 피를 부었고....그러자 원래 빛을 내던 제 영혼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암흑처럼 깜깜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하여 낙태를 한 후 저는 죄에 대한 모든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정말 죄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저는 첫 임신 후 자궁 안에 '루프' 라고 부르는 구리로 된 링을 심어 두었는데 수정란의 착상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제가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이 링이 낙태를 유발한다는 점입니다. 수정란이 자궁 안에 자리잡지 못해 죽으면, 그것이 바로 낙태인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 루프를 착용한 많은 여성들이 월경시 피에 덩어리진 어떤 것이 섞여 나올 때 매우 고통을 느끼는데 생리주기가 평소보다 길어진 경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의사에게 가게 되고, 의사는 특별한 의식 없이 진통제를 처방해 주거나 심할 때는 주사를 놓아 줍니다.

그런데 그 핏덩어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는지요? 그건 갓 수정된 생명체이며 착상하지 못하고 유산된 생명체입니다. 그렇습니다. 루프로 말미암아 착상하지 못한 초미니 유산아입니다. 왜냐하면 난자와 정자와 만나 수정된 후 자궁에서 착상하려고 하지만 루프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수정란은 이미 사람입니다. 수정란은 이미 완전한 형상을 갖춘 영혼을 지니고 있는데도 육적인 형상을 허락받지 못했을 뿐입니다. 얼마나 많은 수정란들이, 즉 완전한 생명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살해되는지를 명백히 보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불씨"가 꺼져버리고 살해되며, 이러한 생명들의 비명이 지축을 뒤흔듭니다.

....

제가 이런 방식으로 얼마나 많은 어린 생명들을 죽였을까요?
제 자궁이 생명의 원천이 아닌 공동묘지가 되었기 때문에 아니, 태아들의 처형지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제가 그토록 우울했던 것입니다.



엄마가 자기 자식을 죽이는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엄마에게 생명이라는 큰 선물을 주시고 생명을 이어나가는 능력을 주셨는데, 자녀들을 모든 위험에서 보호하고 지켜내야만 하는 엄마가 자기 아기를 죽이다니요. 이것은 바로 악령의 사악한 계교로 인한 것인데, 악령은 온 인류가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도록, 그리하여 자신의 미래를 죽이도록, 싹이 말라 버리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비로소 알았습니다. 왜 그동안 제가 내적으로 고통에 차 있었고, 우울했으며, 늘 기분이 나빴고, 늘 흥분된 얼굴로 누구에게나 함부로 화를 내고, 무슨 일이든 불쾌했었는지 이제 알았습니다. 당연합니다. 저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저를 아기 처형소로 탈바꿈시켜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저는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졌고 지옥 언저리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자발적인 낙태는 모든 죄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죄입니다. 왜냐하면 자궁 안의 무방비 상태의 생명을 죽이는 것은, 무죄한 존재를 죽이는 것은 사탄에게 자신의 생명을 인도하는 것이며 사탄에게 자기 영혼을 파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죄한 피를 흘리도록 했기 때문에 악마가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낙태된 태아는 어린양, 즉 "죄 없는 어린양" 이신 예수님과 흡사하며 "우리를 위해 처형되신 하느님의 어린양"과 흡사합니다. 낙태의 죄는 어둠의 세력과 결탁한 것이며, 그것도 아주 견고한 결탁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아이를 죽인 진짜 엄마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점점 더 많은 악령들이 인류를 명방시키기 뒤해 지옥에서 기어나와 온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되는 근본 원인입니다. 오늘날 사탄의 세력과 사탄이 퍼뜨리는 오류가 얼마나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지 다들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지옥문을 막고 있던 봉인이 떨어지고 있으며 악마가 더 이상 넘쳐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그곳에 만들어 놓으신 봉인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 봉인은 계속되는 태아살해로 점점 더 부서지고 있습니다. 지옥의 문에서 악령들이 뛰쳐나오고 있는데 그들의 모습은 끔찍하게 생긴 구더기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지옥의 짐승들이 점점 더 넘쳐나고 있으며 이들이 사람들에게 달라붙어서 마침내 모든 이를 육체의 노예, 향락의 노예, 죄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며 악마의 수중에 떨어지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곳에서 사악한 일이 계속 증가하고 있는것을 우리는 점점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스스로 악령들의 손에 열쇠를 쥐어 주기 때문에 초래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악령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습니다. 매춘의 악령이 판을 치고 있으며, 쾌락주의, 사탄주의, 무신론주의, 자살, 무관심과 냉담을 비롯한 수많은 사악한 일들이 우리 일상에서 점점 더 자주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세상이 점점 더 악해져 가고 있습니다. 매일 수많은 아이들이 살해되고 있으며,이것은 지옥이 승리의 나팔을 불도록 하는것입니다. 이런 무죄한 피 때문에 악령들이 지옥에서 풀려나서 우리 가운데서 해악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죄를 짓지만, 우리가 양심에 침묵하기때문에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것을 염두에 두십시오. 그래서 우리 삶이 점점 더 지옥의 그것으로 바뀌고 있으며 온갖 종류의 문제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온갖 질병들과 우리를 엄습하는 온갖 나쁜 일들, 이 모든것이 죽음의 문화 속에 사는 우리에게 악령들이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런데 어떤 잘못이나 죄를 범하고도 그것을 통회하거나 아파하지 않고 고해성사를 받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악마에게 문을 열어 준 것이 됩니다. 악마가 원하는 대로 우리 삶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 자유와 허락을 준것이기 때문입니다.


낙태가 모든 죄 중 가장 무거운 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낙태를 범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잘못을 범하고도 아무런 죄의식을 가지지 못하게 된 것은 우리들이 이미 완전히 무감각해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종종 철면피처럼 자신에게 무슨 나쁜 일이 생기거나 질병이나 고통이나 근심이 닥쳐올 때면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며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무한한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고해성사라는 치유의 성사를 주셨기에 우리는 회개하고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씻어 내어 사탄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사탄의 영향을 단번에 끝장내 버릴 방법이 고해성사입니다. 그리고 이 방법으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구원의 몫으로 고해성사를 이용하지 않았던것입니다.

그런데 살인을 저지른다는것은 다른이의 생명을 빼앗는것만이 아니며 우리는 간접적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살인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제 말에 귀를 귀울여 주십시오!...

(낙태 시술을 집전하거나 그 시술을 옆에서 돕거나
낙태가 일어나는 상황에 막을 수 있음에도 낙태를 방조하거나
적극적으로나 소극적으로나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돕는것도..
산모에게 낙태를 권유하거나 시키는것도 엄청난 죄악이 됩니다.)


....낙태죄는 우리 영혼의 목에 무거운 사슬을 매달아서 바닥에 가라앉도록 하는데, 그사슬을 우리에게서 결코 벗겨낼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사는 동안 결코 멈추치 않는 고통이 생기는데, 살인을 저질렀다는, 즉 자신이 살인자라는 미칠것 같은 죄의식이 그 사람을 지배합니다.



....지금에 와서 그 일을 생각하면 몸서리라 쳐집니다. 그렇게 태아의 피가 흘려질 때마다 그것은 사탄에게 큰 제물을 바치는 것이며 사탄을 위한 만찬을 제공하는것입니다. 사탄은 그때마다 만세를 부르며 기뻐서 춤을 춥니다.

반면에 태어나지 못한 무고한 아이가 고통으로 죽는 매순간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천년 전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겪으셨던 것과 동일한 고통을 당하시며 고통에 눌려 몸을 움츠리고 괴로워하십니다.

저는 "생명의 책"에서 어떻게 생명이 탄생하는지도 보았습니다. 정자가 난자를 만나는 순간 우리 영혼이 어떻게 탄생되는지를 보았습니다. 그 순간 놀랍도록 아름다운 불꿏이 튀면서 빛을 발하는데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온 빛입니다. 그 순간 그 새로운 영혼은 미래의 엄마의 뱃속에서 빛을 발합니다.

그런데 새 생명이 낙태를 당하게 되면, 비록 눈과 사지는 형성되지 않았지만 그 영혼은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며 신음합니다.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그 영혼이 살해될 때 천상의 모든 성인들이 저편 세상에서 들려오는 그 비명과 신음소리를 듣습니다.

우주의 모든 천체가 마치 산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우주 이 끝에서 저끝까지 크고 분명하게 울려 퍼지는 그 비명 소리에 움츠러듭니다.

지옥에서도 그 비명소리를 크고 또렷하게 들을 수 있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서 모든 악령들은 마치 축제라도 즐기들 뛰쳐나와 환희의 춤을 추며 기쁨의 함성을 지릅니다.

그리고 그런 직후 지옥에서 몇몇의 봉인이 열립니다. 그리하여 끔찍한 악령들이 지옥에서 풀려나서 전 인류를 유혹하여 잘못된 길로 이끌기 위해 세상으로 기어 나옵니다.

그 결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쾌락과 향락에 빠지게 되고 약물 중독자들이 새로 생겨나며, 잔악하고 끔찍한 범죄와 사악한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집니다. 우리들이 매일 뉴스로 사건과 사고를 보고 들으면서 이보다는 더 심할 수 없다고 매번 생각하지만, 그 다음날이 되면 또 새로운 범죄가 생겨나고 더해져서, 점점 더 심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매일 얼마나 많은 태아들이 살해되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 엄청난 범죄의 규모를 헤아린다는 것은 이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이런 무고한 생명들의 피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으면서도 전혀 눈치를 채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이런 일은 일상이 되었고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낙태 반대를 부르짖는 사람이 미친 사람이고 보수적인 사람이며 구시대의 인물이고 뭔가 모자란 사람으로 취급을 받습니다.

...저는 보았습니다! 제가 이 무고한 태아들의 피에 잠겨서 씻김을 당하는 것을. 우리세상에서 씻는 과정과는 완전히 정반대로 저의 하얀 영혼은 이런 피의 세척으로 점점 더 어두워져서 완전히 새까맣게 되었고 쳐다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낙태 사건이 있은 후 저는 더이상 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죄의식이 완전히 사라져서 '이제 내겐 죄가 하나도 없어'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생명의 책을 경이롭지만 고통스럽게 들여다봤습니다. 제 안에서 수많은 난자가 정자와 만나 수정되었고, 그 순간 미세한 생명체로 아주 조그만 아기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들의 영혼이 형성될 때 빛을 발했던 수많은 불꽃들도 보았습니다. 또한 인간에 의해 하느님 아버지의 손에서 떨어져 나간 그 영혼들의 비명소리도 들었습니다.

그 순가 제가 왜 그동안 늘 기분이 나빴고, 늘 비참한 기분으로 투덜대며 지냈는지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저는 종종 상대방의 기분을 거스르는 심한 말을 했고, 때로는 말을 걸지도 못하게 했으며 동료나 가족들이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변덕스럽게 굴기도 했습니다.


온종일 좌절감만 맛볼 때가 많았고, 모든 일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종종 심한 우울증이 밀려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이유가 완전히 밝혀졌습니다. "바로 이 때문이었구나! 내가 태아 처형소가 되었기에 그렇구나!"


발췌- <벼락을 맞았습니다, 나를 살리신 하느님> 아베마리아 출판사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050792


이 책은 1995년 5월 5일 남미에 위치한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서 시작됩니다.
치과 의사이며 이 책의 저자인 글로리아 폴로 오르티츠 박사는 그날 강한 벼락을 맞아 몸이 숯처럼 완전히 타버리면서 회생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의학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주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하느님, 성모님, 성인들을 만나고
악마의 존재를 확인하며, 연옥과 지옥의 실상을 직접 확인하고는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현제 그녀는 전 세계를 다니며,
자신이 체험한 모든 것을 전하고 증거하라는 사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
너는 지상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는 이 체험을 천번이 아니라 백만번이라도 이야기하고 전해야 한다.
네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도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내가 좀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것이다....
그 이유는 듣기를 거부하는 이는 가장 사악한 귀머거리이며,
보기를 거부하는 이는 가장 사악한 장님이기 때문이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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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시술 직전에 출산을 결심했던 한 젊은 엄마의 고백>




마리아 그룬베르거(Maria Grundberger)는 임산부의 출산을 돕는 산파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근무시간이 아닌 때는 한 낙태 시술 병원 앞에 서서, 낙태를 하려고 결심한 여성들의 마음을 바꾸려고 애쓰고 있다.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꿔 아기를 낳게 하려고, 낙태를 막으려고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

"낙태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젊은 산파인 마리아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아니오" 라고 말하면서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출산을 택한 젊은 엄마들이 얼마나 고마워하고 기뻐하는지를 힘주어 말했다. 또한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낙태를 원했던 이들 모두가 얼마나 잘 극복해가는지도 전해주었다.

하루에 15명 내지 18명의 여성들이 낙태 시술을 받으러 오는데 마리아는 그 중에서 일곱명쯤의 여성과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 부분이 결심이 확고해서 어떤 설명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그녀의 조언이 받아들여지는 경우 일 주일에 두서너명의 아기가 생명을 구할 수 있기에 마리아와 동료들은 필사적으로 그 여성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어떠한 비난도 배제한 채 다만 그들을 이해하고 도우려고 노력한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낙태의 본질이나 그 심각성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으며, 진심으로 낙태를 원하지도 않는다. 대부분 그들이 처한 상황에 의해서, 남자친구의 권유에 의해서, 부모가 원하기에 낙태 시술대에 들어선다. 많은 여성들이 그들이 처한 주변 환경에 떠밀려 낙태를 선택하는것이 현실이다. 낙태에 관한 정보에 무지한 것은 물론이요, 자신이 잉태한 생명의 성장에 관해서도 무지하기는 마찬가지다.당연지사로 낙태가 모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오랜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정신적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될 지에 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낙태 시술을 받은 여성은 개인적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는데 이러한 고통을 "낙태 후 증후군" 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여성이 낙태를 포기하고 출산한다면 마리아와 동료들은 출산에 동반되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들은 "알파(ALPHA)" 라고 일컫는 낙태 반대 운동을 펼치며 소식지를 발간하고 있다.

다음은 낙태 시술 직전에 출산을 결심했던 한 젊은 엄마의 고백이다.

2006년 3월, 나는 낙태 시술을 받으려고 병원에 갔다. 남자친구는 어떤 경우에도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다.
나 또한 원치 않은 임신과 남자친구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반응 때문에 절망적인 상태였고, 한 인간의 삶을 책임지기에는 너무 어렸다.

낙태를 받으려고 간 병원 앞에서 마리아를 만났다. 그녀는 거기 길거리에 서서 낙태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녀는 병원에 들어가려는 내게 말을 걸고는 낙태 대신에 취할 수 있는 대안과 도움을 주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한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는 '생명의 집' 으로 마리아와 함께 갔다. 그리고 병원에 전화해서 예약을 취소했다.

마리아는 낙태가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자포자기해 있던 내게 자궁 안에 있는 태아의 사진을 보여주었고, 낙태 후에 동반될 수 있는 신체적 결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당시 살고 있는 곳에서 낙태를 하지 않고 임신한 상태로 계속 생활하기를 힘들어 하자 마리아는 내게 여덟명의 자녀가 잇는 어느 가정을 주선해주었다. 거기서 여러 주 동안 묵으면서 내 안에서 성장하고 있는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마리아를 동반하여 초음파 검사를 받으러 갔다. 태아의 모습을 보았을 때, 태아는 내 보호를 필요로 하는 한 어린 생명이라는 것이 진정으로 내 가슴에 다가왔다.

임신 상태가 진행되면서 나는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남자친구는 내 곁을 떠났다.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나는 아이를 낳겠다고 결정한 것을 단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운 내게 '알파'는 매달 지원금을 보내주었다. 그것이 없었다면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마리아는 나를 위해 온 힘을 다하고 할 수 있는 한 힘껏 나를 도와주었다.

그 해 11월, 극심한 산고 끝에 내 어린 딸 안젤리나를 품에 안았을 때 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행복감을 맛볼 수 있었다. 현재 내가 이 같은 기쁨과 행복의 순간을 맛볼 수 있는 것은, 낙태 시술 병원 앞에 서서 깊은 신앙심으로, 나와 같은 여성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기 위해 낙태 반대 운동을 벌이는 마리아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는 결정먹인 순간에 그들의 도움을 망설이다가 기꺼이 받아들였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 딸 안젤리나는 오늘 이 세상에 있지 않았을 것이고, 나 또한 정신적 육체적인 낙태 후유증을 평생동안 안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마리아'지 147호 <낙태는 해결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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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는 살인이다.
1973년 버나드 나탄손은 뉴욕에 있는 성 루카병원의 산부인과 과장이 되었다. 그때 태아를 관찰할 수 있는 초음파 기기가 최초로 그곳에 설치되었다. 초음파 기기의 힘을 빌려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았던 그 순간의 감동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으로 우리는 인간의 태아를 볼 수 있었고, 진단하고 관찰하며 그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 …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보면서 나는 아주 강한 인상을 받았다.”
초음파 검사의 도입은 인간의 태아에 대한 그의 시각에 극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초음파 기술 덕분에 태아도 정상적인 인간 생명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 기관의 기능을 측량할 수 있고, 태아의 무게를 재거나 나이를 결정할 수 있으며, 삼키고 마시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자거나 깨어나는 것은 물론이요 모든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었다. 태아는 세상에 태어난 아이와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원하는 낙태”에 더 이상 설득되지 않았다. 그는 낙태 수술 횟수를 철저히 제한했으며 의학적으로 꼭 필요한 경우에만 응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낙태 수술을 한 것은 1979년이었다.
1984년부터 그는 낙태에 더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래서 감정을 배제한 채 기구를 여성의 자궁에 삽입하고 태아의 살점을 찢고 도려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는 낙태 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하루에 20회 이상씩 낙태 수술을 했던 친구에게 부탁하여, 낙태 과정을 필름에 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스튜디오에 앉아 필름을 돌려보았으며 그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충격을 주었다.”
그 자리에서 친구 의사도 더 이상 낙태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할 정도였다. 그동안 수없이 낙태 수술을 했지만 그 실상을 객관적으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필름은 전문가의 손을 거쳐 영화 ‘침묵의 절규’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 영화는 아무런 죄도 없고 방어력도 없는 피조물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하고 잔인한 범죄의 기록을 보여준다. 그 영화에서 12주된 태아는 자신의 살점을 찢어내고 흡입하는 기구들을 상대로 필사적인 방어를 되풀이한다. 그 영화는 1985년 3월 1일 미국 플로리다에서 처음으로 상영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낙태를 지지하는 자들은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으며, 언론 매체도 진실을 가리려고 시도했다. 한 TV 방송국은 이 영화의 방영을 거부할 뿐 아니라 생명 보호 광고 시간도 허락해주지 않았다. 이것은 언론 매체들이 죽음의 문화를 위해 존재하는 세력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버나드 나탄손 박사는 학문의 객관적인 토대를 바탕으로 자신의 마음을 열었다. 그는 인간의 생명은 잉태의 순간에 시작되고, 낙태는 살인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였다.

어느 낙태 전문의의 개종 이야기... 출처
http://blog.naver.com/perpe64?Redirect=Log&logNo=90095900137



낙태를 생각하신다면 꼭 읽어 보세요...

http://blog.naver.com/yourpower/20120345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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